빌헬름 막시밀리안 분트는 독일의 과학으로 심리학과 철학, 생물학을 구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실험 심리학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졌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심리학 연구를 위해 최초 정식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것은 심리학을 독립적인 분야로 표시한 사건중 하나이다.
또 1991년 미국 심리학자 29명이 제공한 평가를 바탕으로 분트의 명성을 사상최고로 평가했다.
분트는 바텐주 네카라우재의 만하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목사였다. 분트의 친할아버지는 지리학교수이자 목사였다. 분트가 태어나던 해 독일의 경제는 안정적이었다. 교육, 의료 기술개발이 부의 재 투자가 되는 시대였다. 지식의 발전을 위해 심리학적 연구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분트는 튀빙겐대학교,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박사로 졸업했다. 추후 분트는 요하네스 피터 뮐러에게 단기간 공부 후 물리학자이자 생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의 조교가 되어 생리학 실험 강의를 하곤 했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연구하고 공부한 감각 지각 이론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것을 바탕으로 심리학의 준 교수가 되어 인가의 생리학에 대한 교과서를 출판했다.
분트는 주로 의료 분야가 아니라 심리학 과목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과 동물의 심리학 책을 출판했고 강의도 시작했다. 분트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생리학적 심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것이 기초가 되어 실험심리학이 최초의 교과서가 되었다.
1867년 하이텔베르크 근처에서 분트는 소피 마우(와이프)를 만났다. 그녀는 킬 신학교수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마우의 장녀이자 고고학자 아우구스트 마우의 자매였다. 그 둘의 슬하에 3명의 아이가 있었다.
분트는 취리히에서 유도철학 교수로 승진했다. 그는 에른스트 하인리히 베버와 구스타프 테오도르 페프너와 감각심리학과 심리물리학을 연구했다. 곧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철학과 이론심리학을 개발했다. 분트에게 큰 지적인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최소의 연구소를 개설했다. 이것은 심리학의 기초가 되었고 최초로 만들어낸 인물이 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실은 대학원생들에게 최고의 장소였다. 그들은 모여 심리학 주세에 대해 연구했고 논의했다. 그들은 분트가 발견한 새로운 과학에 대해 배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젊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은 취리히에서 가져온 장비를 분트 연구소에 설치했다. 분트는 실험실과 교실을 더나들며 연구를 했지만 대부분 실험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추후 분트는 더욱 많은 전기기기를 들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며 연구를 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런 과학적인 심리학 연구를 위해 분트는 연구실에서 동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독립적인 실험들은 정식 심리학 연구실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분트는 실험심리학 연구소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루 평균 2시간 예를 들어 인류학, 논리학, 인식론의 심리학 그리고 뇌와 신경학, 생리학등 폭넓은 프로그램을 가르쳤다. 우주론, 역사, 일반 철학까지 가르치기도 했다.
분트는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다량의 논문을 작성햇다. 분트는 러시아, 폴란드, 동유럽 등 여러 학생들과 함께 논문과정을 연구했다. 그 학생들 중 몇몇은 심리학자가 되기도 했다. 독일인 오스왈드 쿠르페, 에른스트 뮤만, 휴고 뮌스터버그, 문화심리학자 윌리 헬패치등 이 있다. 그가 세운 실험심리학 연구소는 철학의 근본이 되었다.
학생들에게 연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심어주었고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로 위상을 확립했다.
분트의 심리학은 인간은 단순히 의식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심리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다. 그 심리현상이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 변화들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입장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행동을 하는데 이 유과 원인이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분트는 인간에게는 동기부여가되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묘사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차이를 중요시했다. 심리물리학적으로 정신과 현상과의 관계에 대해 물리적 현상을 설명했다. 서로 비교는 될 수 없지만, 특정한 정신적 과정이 규칙적으로 대응한다고 했다. 즉 정신적 변화는 신경 생리학적에 기초를 두고는 있지만 별개의 인과관계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작업은 심맇가의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세대의 심리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었다.